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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바깥에 숨은 소소한 행복

입력 2024.03.07 13:39 김혜진 기자
[아트플러스 뚜벅이여행-함평]
돌머리해수욕장의 목조 다리가 무지개색을 입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MBTI를 믿는가. MBTI는 간단히 설명하자면 융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만들어진 자기 보고식 성격 유형 검사이다. 4가지 분류 기준에 따라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인데 젊은층에서 인기다. 요즘은 MBTI를 모르면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상에서 "난 I라서" "너 T야?" "J로서 P인 널 보면…"과 같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특히 여행과 관련한 이야기에서는 MBTI가 자연스럽게 나오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여행 일정을 계획하는 방식에 따라 'P냐, J냐'와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J는 체계적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이를 따른다면 P는 보다 유연하게 여행을 대한다는 것이 요점.

필자는 J다. '뚜벅이 여행'을 떠나기 전, 여러 이유를 따져 여행지를 정한 후 이동 방법과 이동 시간, 여행지 정보 등을 최대한 수집한 후 코스를 정해 여행을 떠난다. 동선에 따른 방문 순서는 기본이고, 1안이 진행되기 어려울 경우 2안까지 정해야 준비 완료다. 지금까지 '뚜벅이 여행'은 그런 식으로 진행됐다. 더구나 뚜벅이 여행은 시간과 체력 안배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행 계획을 늘 철저히 세워야 했다.

색색의 다리가 기존 목조다리의 단조로움을 줄여준다. 사진도 잘 나오는 건 덤.

이번엔 명절 연휴를 보낸 이후 왜인지 '딸기 케이크'가 먹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함평을 여행지로 정했다. 유명한 딸기 케이크집이 있기 때문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딸기케이크는 다 팔려서 먹지 못했다. 여행 코스도 마음대로 되지 못했다. 휴관 등 때문에 두 곳에서 허탕을 경험하고 길바닥에 시간을 버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 꽤 괜찮았다면 봄 같은 날씨 덕이었을까, 필자가 긍정적인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함평이 뚜벅이에게 썩 괜찮은 곳이었기 때문일까.

돌머리해수욕장의 명물인 등대와 반짝이는 바다가 생각이 많은 머리에 쉼을 준다.

◆무지개색 입은 바다

'함평'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명소 중 하나가 '돌머리해수욕장'이 아닐까. 뻔한 듯하면서 빼기엔 아쉬운 명소다. 특히 뚜벅이 여행자들에게 돌머리해수욕장은 인근 주포 한옥마을과 함께 걸어서 즐기기에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다.

돌머리해수욕장은 지난해부터 무지개색을 입고 또 다른 명소가 됐다. 유년 시절부터 종종 드라이브 겸 들렀던 곳인지라 새삼 달리 느껴졌다. 생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코흘리개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가 멋 좀 부릴 줄 알게 되며 어색해진 느낌 같기도 하다.

주포부터 무지개색 방지석이 길을 안내하듯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 있더니 돌머리해수욕장의 건조한 목조다리도 형형색색의 '포토 스팟'으로 변신했다. 비교적 낮은 수심으로 유아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은 덕에 만들어진 유아 놀이시설도 눈에 띈다. 해변을 따라서는 글램핑장이, 그 위쪽으로는 카라반존이 있어 시간을 여유 있게 두고 바다를 다양하게 즐기기 좋아 보인다.

무지개 다리 끝에 설치된 '돌머리' 모양의 벤치 포토존.

무지개빛 목조다리를 걸으며 바다 전망을 즐겨본다. 물이 들어오는 때라, 물이 차 있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해 본다. '물이 저기서 이렇게 들어오는 구나' '물 아래 숨겨졌던 바위가 갈매기들의 쉼터였구나' 같은.

400m 정도 되는 목조다리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덕에 단조롭진 않다. 돌머리해수욕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등대를 바라보면 낙조 때와는 또 다른 장면을 만들어 낸다. 내리는 햇빛이 부서져 조각이 된 듯 반짝이는 물결은 잠시 동안 '멍'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며 복잡했던 머리에 휴식을 준다.

뚜벅Tip

돌머리해수욕장을 방문할 때는 물때표를 확인하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물이 나가고 난 자리에 남은 갯벌도 또 다른 볼거리가 되지만 사진이 중요한 이들에게는 아쉬울 터다.

주포한옥마을과 돌머리해변으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는 걷기 좋은 길도 마련돼있다. 무지개색 방지석이 귀엽다.

◆걸음걸음이 즐거운 마을

무지개색 방지석을 따라 바다를 감상하며 30여분 걸으면 주포한옥마을이 나온다. 주포한옥마을은 핑크뮬리 명소이기도 해 가을철 사진 명소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 마을은 2013년 새로 조성한 한옥마을이다. 약 50채 정도의 한옥이 있는데 이중 30여채는 민박집으로 쓰이고 있으며 나머지는 개인이 살고 있다. 이 같은 안내는 마을 초입에 세워진 민박 안내 그림 지도를 통해 알 수 있어 한옥 구경 전에 민가인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주포한옥마을의 모습. 한옥마다 각각의 개성이 있어 구경하기 좋다. 단, 민박집이 아닌 가정집도 있으니 주의해야한다.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각 집마다 특징을 갖고 있어, 낮은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붕도 자세히 보면 다르다.

특히 각 집마다 개성을 살려 꾸민 마당은 주택살이에 대한 로망을 자극한다. 흔들의자를 둔 집, 모두가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파고라를 설치한 집, 귀여운 소품으로 꾸민 집 모두 부럽지 않은 것이 없다. 봄볕 같이 따뜻한 햇빛에 이불을 널어 고실고실 말리는 풍경, 작은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이 정겹다.

마을을 둘러싼 데크 산책길. 산책하며 한옥도 구경할 수 있다. 마침 산책을 즐기고 있는 마을 고양이를 만나 함께 걸었다.

이 마을은 계획 지구인만큼 한옥 외에도 소소한 즐길 거리가 구석구석 있다. 마을 중간에는 봄이면 예쁘게 함께 피어날 꽃노을정원이 멋진 정자와 함께 자리하고, 마을을 빙 둘러서는 데크 산책로가 마련돼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마을의 다양한 집들을 또 다른 시각에서 둘러볼 수 있고 햇빛을 즐기기 위해 나온 이 마을의 다양한 고양이들을 만날 수도 있다. 나른한 고양이의 걸음걸이를 따라 살금살금 걸으니 이 마을에 숨어든 도둑고양이가 된 듯한 기분도 든다.

뚜벅Tip

일정이 여유롭다면 해수찜치유센터 이용을 추천한다. 최소 1인부터 최대 15인까지 프라이빗하게 해수찜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네이버예약 등을 통해 사전 예약할 수 있고 빈 방이 있으면 현장에서도 바로 이용가능하다. 해수찜을 이용하면 사우나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이를 좋아하는 여행객이라면 일석이조다. 지난해 문을 열어 시설이 깨끗하고 이용료도 크게 비싸지 않다. 화요일은 휴관.

빨간 벽돌에 길쭉한 창, 2층의 둥근 아치창, 뾰족한 팔각의 종탑이 유럽의 건물을 보는 듯하다.

◆세월 켜켜이 쌓인 이국적 건물

동선을 고려해 함평읍에서 가깝고 여태 함평에 와서 가보지 못한 곳에 가고 싶어 찾은 곳이 옛 함평성당이다. 앞서 예상하지 못한 이슈 등으로 코스를 변경해야 해 찾은 곳이기도 하다.

급하긴 했어도 아무 곳이나 가긴 싫었다. 대체로 어떤 지역을 여행할 때 고택이나 옛 건물을 재생한 곳에 방문해, 그 공간만이 가진 분위기를 느끼고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좋아하는 필자의 취향이 묻어난 선택이다.

빨간 벽돌의 옛 함평성당.

점심을 해결하기 좋은 읍에서 걸어서 7분여면 옛 함평성당에 도착할 수 있다. 적벽돌 건물이 멀리서부터 특별한 분위기를 풍긴다. 옛 함평성당은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로 1952년 완성됐다. 국내의 여타 유명 성당들에 비해 웅장하지는 않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현대 성당 건축의 시초로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2층 규모의 이 건물은 마치 유럽 거리의 건물을 보는 듯하다. 세로로 길게 난 1층 창과 둥근 아치형의 긴 2층 창문, 중앙의 팔각 종탑 등 수직적 건축 요소들이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늘과 맞닿은 첨탑.

외관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웠지만 내부도 볼 수 있을까 해 1층 문과 외부 계단으로 이어진 2층 문을 열어보았지만 잠긴 상태라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2층 문 앞으로는 굵은 밧줄이 위에서부터 늘어뜨려져 있는데 이를 보고 팔각 공간이 종탑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72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이 건물은 우리 현대사의 굴곡 또한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3년여 만에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옛 함평성당은 1949년 여름 착공해 이듬해 상량식까지 마치고 세 달 후 봉헌식을 계획했지만 10월, 한국전쟁 중 후퇴하던 공산군이 불을 질러 파괴된 바 있다. 1년 2개월 후 교황 사절단이 방문해 개축 지원을 약속했고 1952년 4월 파괴된 건물을 고치기 시작, 그해 10월에야 상처를 모두 봉합하고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당시 건물을 짓기 위해 스스로 나선 신자들의 허무와 상처는 어땠을까 생각하니 칠순이 넘은 고건물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고맙기까지 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옛 건물만 보고 가기 아쉬워 1984년 같은 부지에 새롭게 지어진 성당 건물도 들렀다. '성당'하면 상상 속에 그려지는 모습이었다. 특히 1층의 큰 창과 2층의 작은 창은 스테인드글라스였는데 이를 통해 들어오는 색색의 빛이 신비로움을 자아내 한참을 보게 만들었다. '물멍' '불멍'도 아니고 '빛멍'하게 만드는 이 순간이, 이번 여행의 아주 작은 부분이 생각지 못한 행운으로 다가왔다.

계획이 빗겨 간 이유가 이걸까. 항상 보던 풍경이 아닌 예상 밖의 모습이 '여행에 한 번쯤은 빈 칸을 둘까'하게 만든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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